포구와 장터에서 살아 숨 쉬던 민간 신앙과 장승·솟대 문화
조선시대 지방 포구와 장터에서는 단순한 상업 거래를 넘어, 지역 사회의 정서와 신앙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었다. 그 중에서도 장승과 솟대는 단순한 조형물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의 정신적 버팀목이었다. 특히 포구와 장터처럼 사람과 물자가 끊임없이 이동하는 공간에서는 외부의 악귀를 막고 상거래의 평안과 풍요를 기원하는 민간 신앙이 더욱 강하게 작동했다. 조선 후기 문헌을 살펴보면 포구 입구에 장승이 세워지고, 장터 어귀에 솟대가 솟아 있는 모습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이는 지방관아가 통제하는 공적 공간에서도 민간의 자생적 신앙 문화가 얼마나 뿌리 깊게 자리 잡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가 된다.
포구와 장터,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에서 싹튼 민간 신앙
조선시대 포구와 장터는 단순한 경제 활동의 거점이 아니었다. 여러 지역의 사람들이 몰려들고, 생필품과 특산물이 거래되는 장소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이 공간에 대한 경계심과 신성함을 동시에 느꼈다. 특히 포구는 수로와 바다가 만나는 경계 지점이었다. 사람들은 물길을 통해 부와 생계를 얻었지만, 동시에 물길은 홍수나 풍랑, 해적과 같은 위험을 동반하는 곳이기도 했다. 이러한 경계적 성격은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신의 보호'를 기원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포구 입구에는 종종 마을 사람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장승을 세우거나 솟대를 꽂았다. 장터 역시 마찬가지였다. 5일장, 7일장과 같이 주기적으로 열리는 장터는 매번 낯선 사람과 물건이 유입되는 곳이었고, 상거래의 성패는 신의 가호에 달려 있다고 여겼다. 장승과 솟대는 이 모든 상업 활동이 무사히 진행되기를 기원하는 민중의 염원이 담긴 존재였다.
장승, 외부의 악귀를 막고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
장승은 주로 장터의 입구나 포구의 어귀에 세워졌다. 이는 단순한 마을 경계 표시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장승은 귀신이나 역병 같은 악귀가 마을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는 수호신 역할을 맡았다. 실제로 전라도와 충청도의 여러 포구에서는 커다란 나무 장승에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같은 글귀가 새겨졌다. 이는 하늘과 땅의 신이 마을을 지켜준다는 의미였다. 조선 후기의 군산장과 영산포장 기록을 보면, 장승이 단순한 민속물이 아니라 주민들의 치성 대상이었음이 나타난다. 특히 포구에서는 선박의 안전과 어획량 풍요를 기원하는 용도로도 장승이 활용되었다. 선원들이 출항하기 전에 장승에 술을 뿌리고 절을 올리는 장면은 당시 어민들의 일상이었다. 또, 장터에서는 상인들이 첫 거래 전 장승에 고사를 지내거나 작은 비단 조각을 매달며 하루 장사가 잘 풀리기를 기원하기도 했다. 이렇듯 장승은 포구와 장터에서 무속신앙과 상업적 기원의 중심적 매개체였다.
솟대, 마을과 장터의 번창을 기원하는 하늘과의 연결 고리
솟대는 장승과 비슷한 기능을 하면서도 약간 다른 상징성을 지녔다. 솟대는 주로 장터 한쪽이나 포구 근처의 높은 지점에 세워졌으며, 끝에는 나무새가 앉아 있거나 깃발이 달려 있었다. 솟대는 하늘의 기운을 받아 마을에 복을 내리는 신호탑이었다. 조선 후기 농촌 사회에서는 솟대를 세우는 마을은 풍년이 든다는 믿음이 강했다. 이는 장터에서도 비슷하게 작용했다. 상인들은 장터가 북적이고 활발해지기를 기원하면서 솟대에 작은 새 모양의 조각품이나 작은 천을 달아두었다. 전라도 삼례장과 충청도의 강경장 일대에서는 상인 공동체가 솟대를 관리하며 장터의 안녕을 기원하는 고사를 열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솟대는 장승처럼 악귀를 쫓기보다는 '복'을 부르고 '기운'을 모으는 역할을 했고, 특히 장터에서는 상인들 간 유대감을 다지는 매개체 역할도 했다. 솟대 주변에서는 아이들이 뛰놀고 어른들이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자연스럽게 공동체 문화가 형성되었다.
포구와 장터의 장승·솟대 문화가 남긴 유산
오늘날 많은 조선시대 포구와 장터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장승과 솟대 문화는 일부 지역에서 여전히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전남 영산포나 군산 내항 근처에서는 관광객을 위해 새로 세운 장승과 솟대가 남아있고, 충남 강경장 인근에서도 옛 솟대 터가 복원되었다. 이는 단순한 문화재 보존이 아니라 조선시대 민중들의 삶과 신앙, 상업 문화가 어떻게 결합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특히 과거 포구와 장터에서 장승과 솟대가 단순히 미신적 풍습이 아닌, 공동체를 결속시키고 경제 활동을 활성화하는 중요한 심리적 지주였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대의 시장과 포구가 점점 상업성과 관광지로만 소비되고 있지만, 그 바탕에는 조선 민중의 생존 의지와 공동체의 협력 정신이 담겨 있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향후 지방 포구와 장터를 활용한 문화재 복원이나 지역 축제에서도 이러한 민간 신앙의 의미를 되살리는 것이 현대 사회에 새로운 문화적 가치를 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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