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불교 승려의 농민운동 참여사

역사학

한국 불교 승려의 농민운동 참여사

xolo1215 2025. 7. 4.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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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불교 승려

 

불교, 사회 운동의 변두리인가?

일반적으로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한국 사회운동사에서 불교 승려는 주변적 존재로 여겨져 왔다. 유학 중심의 봉건 사회 속에서 불교는 억압받는 종교였고, 승려는 산속에 은둔하며 현실과 거리를 둔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근대의 격변기, 특히 19세기 후반~20세기 초에 걸친 반봉건 농민운동과 계몽운동 과정에서 일부 승려들은 새로운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한다. 이 글에서는 근대기의 불교 승려들이 어떻게 농민운동에 참여했으며,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봉건 질서에 도전했는지를 살펴본다.

조선 말기: 억압 속의 불교, 그러나 저항의 씨앗

조선은 유교 이념에 따라 불교를 억압한 대표적 사회였다. 특히 태종과 세종 대에 이르러 불교는 국가로부터 철저히 배제되었고, 승려는 공적인 공간에서 활동이 제한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19세기 말까지도 이어졌지만, 불교 내부에서는 점차 사회 참여에 대한 자각이 일기 시작했다.

당시 승려들 가운데 일부는 지방 농민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산사(山寺)는 지역 주민들의 의식주 문제와 종교 행위를 동시에 지원하는 공간이었으며, 이는 자연스럽게 사회 갈등과도 접촉면을 가지게 했다. 농민 반란이나 세금 저항 운동이 일어날 때, 승려들이 이들과 연대하거나 조정자 역할을 했던 사례도 점점 드러난다.

동학농민운동과 불교 승려의 간접적 개입

1894년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은 대표적인 반봉건 민중운동이다. 동학은 자체적으로 새로운 신흥 종교였지만, 지방에서는 이 운동에 불교계 인사들도 동조하거나 연대한 정황이 존재한다. 특히 전라도와 충청도 지역 사찰에서는 군수나 토호 세력에게 시달리던 농민들이 사찰을 피난처로 삼았고, 승려들이 이들을 은밀히 보호하거나 정보를 전달한 사례가 있다.

이는 적극적인 ‘참여’라기보다는 종교적 양심에 따른 민중 지원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를 전후해 불교계 내부에서도 현실 참여 불교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고, 그 흐름은 20세기 초로 이어진다.

20세기 초: 근대 계몽과 항일, 그리고 농민과의 접점

1910년 일제의 식민지화 이후, 불교계는 크게 두 흐름으로 나뉘었다. 하나는 일본 불교의 영향을 받아 국가 협력 노선을 걷는 보수 진영, 다른 하나는 조선불교 혁신과 사회 개혁을 추구한 진보적 승려 그룹이다.

진보 진영의 대표주자 중 한 명이 바로 한용운(1879~1944)이다. 그는 단순한 종교인이 아닌 민족주의자, 독립운동가, 문필가였다. 그는 조선 불교가 일제 협력에 머물러선 안 되며, 민중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백용성, 이회광, 최범술 등은 불교의 대중화와 농민 교육, 민족 계몽에 앞장섰다. 이들은 농촌 지역에서 강연, 야학 운영, 농민 계몽을 위한 불교 포교당 설치 등을 시도했고, 특히 농민의 자치조직인 동맹회, 학회 조직에도 관여했다.

백용성과 불교 대중화

백용성은 전국을 돌며 불경 한글화와 보급 운동을 펼쳤고, 이를 통해 문맹률이 높았던 농민들에게 불교를 통한 자아 성찰과 정치적 각성을 유도했다. 그가 주장한 "불법은 만인의 평등을 전제로 한다"는 말은 당시 봉건적 계급 구조에 대한 종교적 저항 선언이었다.

사찰과 농민: 협력의 공간

사찰은 단순한 종교적 공간이 아니라, 교육·문화·사회 운동의 거점이기도 했다. 1920~1930년대 들어 농민들이 지주와 일본인 회사의 수탈에 시달리던 시기, 일부 승려들은 농민의 자조 조직을 지원하거나 임야 분쟁에서 중재자 역할을 했다. 강원도, 경상도 일부 지역에서는 승려들이 농민에게 농지 계약서를 대신 작성해주거나, 일본 경찰의 단속 정보를 미리 전달하는 등의 활동이 기록되어 있다.


수행자에서 실천가로

불교 승려들 역시 일정 부분에서 사회 변혁의 물결에 동참했으며, 때로는 은밀하게, 때로는 공개적으로 봉건적 억압에 저항했다.

물론 그들의 참여는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았고, 전국적 운동으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들의 활동은 불교가 단지 산 속에서만 머무르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증거이다. 이들은 묵묵하게 꾸준히 민중과 함께 걸었고, 수행자에서 실천가로서의 전환을 시도한 선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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