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도시 계획과 왕경 구조 비교

역사학

발해 도시 계획과 왕경 구조 비교

xolo1215 2025. 8. 10.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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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도시 건설 배경과 입지 전략

발해 도시 계획과 왕경 구조비교

발해는 고구려의 유민과 말갈족이 중심이 되어 698년에 대조영이 건국한 국가로, 그 영토는 오늘날의 만주, 연해주, 한반도 북부까지 아우르는 광대한 지역에 걸쳐 있었다. 발해는 단순한 변방 세력이 아니라, 고도로 정비된 국가 체계를 갖춘 정치체로 성장했다. 그 중심에는 도시계획, 특히 왕경(王京)의 정비가 있었다. 발해는 수도를 단순히 정치의 중심지로 보지 않고, 천하 질서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인식했다. 그렇기 때문에 수도의 입지 선정에는 정치적, 종교적, 군사적 요소가 복합적으로 고려되었다.

발해의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는 오늘날 중국 길림성 돈화 지역에 위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발해 초기에는 동모산(東牟山)에 수도를 두었으나, 756년 이후 본격적으로 상경을 중심으로 한 도시체계를 구축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발해는 고구려의 성곽 축조 기술뿐만 아니라 당나라의 도시계획 모델을 일부 수용하되, 자국의 지리적·문화적 특성을 반영한 독자적인 양식을 창출했다. 발해는 도시를 해발 500m 이상 고지대에 건설하여 방어력을 확보하는 동시에, 강과 산의 흐름에 따라 천문적·풍수적 기준도 반영하였다. 이러한 입지 전략은 단지 방어 목적이 아니라, 왕권의 신성성과 중심성을 상징하기 위한 철학적 선택이기도 했다.

발해 상경성의 구조와 특징

발해 상경용천부는 철저하게 계획된 도시였다. 고고학 발굴에 따르면, 상경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나뉘며, 그 구조는 정방형의 체계를 따르고 있었다. 중심에는 궁성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그 북쪽에는 왕궁이 배치되고, 남쪽으로는 정사 공간인 정당성(政堂省)이 위치하였다. 이는 당나라 장안성의 배치를 연상시키는 구조지만, 세부적인 구성에서는 발해 고유의 방식이 강하게 드러난다. 예를 들어 궁성과 일반 행정기관의 배치를 엄격히 구분하면서도, 일반 거주 지역과 상업 지역이 복합적으로 연결된 구조를 보여준다.

상경성 내부는 크게 4방향의 대로로 나뉘며, 주요 관청과 시장, 주거 지역이 체계적으로 배치되었다. 특히 시가지 내부에는 배수로와 도로, 건물의 기초 시설이 확인되며, 이는 계획도시의 면모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발해는 도시 곳곳에 관청과 관리를 두어 행정을 분산시키고, 중심부에는 궁성에 이르는 대로(大道)를 중심축으로 설정하여 왕권의 권위와 상징성을 극대화하였다. 또한, 발해의 궁성은 높은 단층 석축 위에 궁전을 세우는 형식으로, 시각적으로도 위엄을 강조하고 자연 지형을 활용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당나라와의 비교를 통한 발해 왕경의 독자성

발해의 도시계획은 당나라 장안성을 일정 부분 모방했지만, 그 구조는 단순한 복제라기보다는 선택적 수용과 창조적 재구성의 결과였다. 당나라 장안성은 철저한 격자형 구조로, 황성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 구조를 강조한 반면, 발해 상경성은 비대칭적 요소와 자연 지형을 살린 구성을 통해 차별화되었다. 장안성의 경우 황제가 거주하는 궁전이 도시의 북쪽 중심에 위치했으며, 그 주변으로 관청, 시장, 거주지가 계층적으로 분리되었다. 반면, 발해는 지형적 제약과 고구려 전통의 영향으로 인해 더 입체적이고 유연한 배치 방식을 채택했다.

특히 발해의 왕궁은 장안성의 궁궐 구조와는 다른 형태를 띠었다. 발해는 황제가 거주하는 공간과 행정 공간을 완전히 분리시키지 않고, 기능적 효율성을 고려한 혼합 배치를 택하였다. 이는 당시 발해가 중앙 집권적 행정체계와 귀족 중심 정치 구조를 절충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또한 발해의 수도는 주변 소도시와의 연결성을 고려해 물류와 교통의 흐름을 중시했으며, 각 부성(副城)과의 연계 속에서 네트워크형 도시 구조를 발전시켰다. 이처럼 발해는 당의 이상적인 도시 구조를 참조하되, 실질적인 국가 운영과 자연 환경에 적합한 형태로 이를 변형하여 적용하였다.

도시계획을 통해 본 발해의 국가 정체성

발해의 도시계획은 단순히 건축 기술이나 구조적 양식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발해가 스스로를 어떤 국가로 인식했는지를 드러내는 중요한 단서다. 발해는 자신을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자처하며, 동아시아 질서 속에서 자주적 국가로 자리매김하고자 했다. 이러한 정치적 의지는 수도 건설과 도시 구조의 구체적 설계에도 투영되었다. 왕궁의 위계적 배치, 행정기관의 정비, 도로망과 방어 체계의 구성 등은 모두 발해가 고대 동아시아 질서 속에서 하나의 문명국가로 존재하고자 했던 의지를 반영한다.

또한 발해는 왕경의 구조를 통해 왕권의 정당성과 신성성을 강조했다. 궁성은 도시의 가장 중심에 위치했고, 왕이 사용하는 건물은 가장 높은 지대에 세워졌다. 이는 단지 전략적 요충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의 가깝고 백성과의 멀어진 위치를 통해 통치 권위의 위계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발해의 왕경은 결국 단순한 수도가 아니라, 정치와 문화, 외교의 모든 방향성을 품은 ‘상징체계’ 그 자체였다. 이러한 점에서 발해의 도시계획은 오늘날까지도 독자적인 고대 문명으로서의 위상을 설명해주는 핵심 요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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