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들어 한국은 정치, 경제, 문화 전반에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나라로 부상하고 있다. K-드라마, K-POP, 한국 음식에 대한 세계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은 어떤 역사를 가진 나라일까?’라는 질문도 함께 떠오르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한국사에 대한 해외의 관심은 분명 증가하고 있지만, 그에 비해 한국 역사학의 세계화 수준은 여전히 제한적이라는 지적도 많다. 한국사 관련 논문과 콘텐츠는 주로 국내에서 생산되고, 영어를 포함한 외국어로 번역되는 비율은 매우 낮은 편이다. 동시에 서구 중심 역사학계에서는 아직도 동아시아 역사 연구의 중심이 중국과 일본에 편중되어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한국 역사학은 과연 세계 속에서 어떤 가능성과 한계를 갖고 있는가? 지금은 한국사 자체의 내용뿐 아니라, 그 전달 방식과 학술적 시스템의 문제까지 함께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한국사에 대한 해외 관심의 증가
최근 20년간 한국사에 대한 해외의 관심은 꾸준히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한류의 세계적 확산과 함께, 한국의 정치사와 근현대사에 대한 질문이 자연스럽게 유입되고 있다. 예를 들어, 외국의 학생들은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이나 영화 ‘택시운전사’, ‘1987’ 등을 통해 일제강점기나 5·18 민주화운동 같은 역사적 사건을 접하면서 한국 근현대사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이와 동시에 미국, 영국, 독일, 호주 등의 대학에서는 한국사를 전공으로 하는 강좌가 개설되고, 일부 교수들은 한국 고대사, 조선시대 정치 구조, 동학농민운동 등 보다 세부적인 주제를 연구하고 있다. 특히 미국 내 아시아학과에서는 ‘동북아 국제정치의 역사적 배경’이라는 관점에서 한국사의 지정학적 위치에 대한 학술적 연구도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분명히 고무적이지만, 여전히 구조적 한계가 존재한다.
세계화의 장애 요인: 언어, 번역, 자료 접근성
한국 역사학의 세계화가 더디게 진행되는 핵심 요인은 언어와 번역의 장벽이다. 대부분의 한국사 관련 연구서와 사료는 한국어로 되어 있으며, 이는 외국 연구자들에게 접근 자체를 어렵게 만든다. 특히 고대 한국어, 한문, 국한문 혼용체 등은 번역 난이도가 매우 높기 때문에 전문 인력이 아니면 접근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또한 주요 사료집인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도 완전한 영어 번역이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번역본이 학문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은 한국사에 대한 해외 연구자들의 자율적 연구를 어렵게 만들고, 결국 중국이나 일본에서 간접적으로 인용하거나 왜곡된 해석을 따르게 만드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이는 한국사가 국제 역사학계에서 독립적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는 구조적 한계로 작용하고 있다.
일본·중국 중심 동아시아 서사의 구조적 편중
현재 국제 역사학계, 특히 서구권의 동아시아사 연구에서 중심 축은 여전히 중국과 일본이다. 이들 국가는 오랫동안 막대한 예산과 인력을 투입해 자국의 역사를 전 세계에 알리는 데 성공해왔다. 예를 들어, 일본은 일제강점기를 자신들의 근대화 공헌으로 서술하는 방식으로 많은 영어 자료를 제작했고, 중국은 동북공정 프로젝트를 통해 고대 한국사 일부를 자국 역사로 흡수하려는 시도를 계속해왔다. 반면, 한국은 국책기관 수준에서 외국어 역사 콘텐츠를 꾸준히 생산해온 경험이 부족하다. 그 결과, 한국사는 종종 중국사나 일본사의 부속 개념으로 소개되며, 독자적인 역사 서사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 특히 고조선, 삼국시대, 발해사 같은 분야에서는 중국과 일본의 해석이 국제 학계에서 ‘표준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단순한 정보 부족이 아니라, 역사 주권의 문제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한국 역사학의 세계화를 위한 과제
한국 역사학이 세계 속에서 독립적이고 영향력 있는 학문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선결 과제가 있다. 우선 가장 중요한 것은 전문적인 번역 인프라 구축이다. 단순한 직역을 넘어서, 역사적 맥락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역사 전공 번역자 양성이 필수적이다. 또한 주요 역사서의 다국어 번역 사업은 국가 주도의 장기 프로젝트로 추진되어야 한다. 두 번째로는 국제 공동 연구의 활성화다. 외국 대학이나 연구기관과의 협업을 통해 공동 논문, 학술행사, 학자 교류 등을 확대함으로써 한국사가 세계적 담론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세 번째는 디지털 아카이브와 오픈데이터 시스템의 구축이다. 해외 연구자들이 클릭 몇 번으로 한국사 사료에 접근할 수 있도록 체계적인 온라인 플랫폼을 제공해야 하며, AI 기반 검색 기능이나 다국어 해설도 필요하다. 마지막으로는 대중 콘텐츠의 질적 향상이다. 영화, 드라마, 유튜브 등의 미디어 콘텐츠가 세계인에게 한국사를 소개하는 창구가 되고 있는 만큼, 학문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콘텐츠 제작이 병행되어야 한다.
한국사에 대한 세계의 관심은 분명히 증가하고 있지만, 그것을 실질적인 학문적 확산으로 이어가기 위해서는 구조적인 개선이 필요하다. 언어의 장벽, 번역의 질, 자료 접근성, 국제 정치적 서사 경쟁 등 복합적인 과제가 존재하며, 이는 단순히 학계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적 전략으로 접근해야 할 사안이다. 한국 역사학의 세계화는 단순히 한국을 알리는 작업이 아니라, 한국이 가진 고유의 역사 해석과 담론을 국제사회에 제시하고 기여하는 과정이다. 이제는 외국의 시선에 의존하지 않고, 주체적인 서사와 고유한 사관을 기반으로 세계 속에 한국사를 확장시킬 때다. 그것이 바로 21세기형 역사학의 방향이고, 역사적 자주성을 실현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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