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구와 장터 기록

조선시대 장터 - 풍물놀이와 여흥문화

xolo1215 2025. 7. 19.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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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장터, 단순 거래 공간이 아니었다 

조선시대 장터는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경제적 공간을 넘어선 중요한 사회문화적 장소였다. 사람들은 장날이 되면 먹을거리를 사고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는 동시에 다양한 놀이와 오락을 즐기기 위해 장터로 모였다. 당시 교통수단이 제한적이었던 시대에 장터는 한 마을에서 다른 마을로 정보를 전달하는 중요한 교류의 장이었으며, 서민들의 흥과 문화가 살아 숨 쉬는 현장이었다. 특히 장터에서는 풍물놀이와 다양한 여흥문화가 사람들을 모이게 했고, 장날은 그저 장사가 아닌 축제의 날로 여겨졌다. 이 글에서는 조선시대 장터에서 성행했던 풍물놀이의 다양한 모습과, 그 안에서 꽃피웠던 서민 여흥문화를 구체적이고 현실감 있게 살펴본다. 기록에 자주 등장하지 않는 평범한 백성들의 즐거움이 어떻게 살아 숨 쉬었는지 알아보자.

조선시대 장터 풍물놀이와 여흥문화

 장터 풍물놀이의 기본 구조와 진행 방식

조선시대 장터에서 가장 눈에 띄는 문화 중 하나는 ‘풍물놀이’였다. 풍물놀이는 꽹과리, 징, 장구, 북 등의 악기를 이용하여 흥겹고 경쾌한 가락을 연주하고, 다양한 춤과 놀이가 어우러진 종합 민속공연이었다. 사람들은 장터에 모이면 우선 풍물패가 퍼레이드를 벌이며 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풍물패의 리더인 상쇠가 리듬을 이끌며 장터 주변을 한 바퀴 도는 ‘길놀이’를 시작하면, 상인과 농민들은 자연스럽게 몰려들었다. 그 뒤를 이어 마당 한복판에서는 ‘판굿’이 열렸다. 판굿은 정해진 무대가 아니라 장터 마당을 중심으로 펼쳐졌으며, 다양한 농악 가락과 함께 채상춤, 상모돌리기, 버나놀이 같은 화려한 묘기가 선보여졌다.

풍물놀이의 특징 중 하나는 단순히 구경거리로 끝나지 않고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참여시키는 데 있었다. 어린이들은 풍물패를 따라 춤을 추고, 어른들은 박수를 치며 추임새를 넣었다. 일부 장터에서는 마을 청년들이 즉석에서 춤판에 참여하는 ‘놀이판’이 벌어지기도 했다. 풍물놀이는 장터에 오기 전 들판에서 일하던 농민들의 지친 몸과 마음을 풀어주는 중요한 여흥 수단이었다. 때로는 풍물패가 풍년 기원 굿이나 액막이 의례를 간단히 치르기도 했는데, 이는 단순한 놀이를 넘어 마을 공동체의 안녕을 비는 문화적 기능도 겸하고 있었다. 이러한 다층적 기능 덕분에 풍물놀이는 장터 문화에서 가장 필수불가결한 오락으로 자리 잡았다.

장터 여흥문화 속 다양한 민속놀이 

장터에서는 풍물놀이 외에도 다양한 민속놀이와 오락이 성행했다. 특히 남성들 사이에서는 씨름판이 큰 인기를 끌었다. 장터 한켠에는 임시 씨름장이 만들어지고, 마을 청년들이 자존심을 걸고 힘겨루기를 했다. 때로는 인근 마을의 청년들이 서로 대결하는 ‘마을 대항 씨름’이 열려 장터는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다. 씨름 우승자에게는 쌀, 소금, 술, 천 등 실질적인 상품이 주어졌고 이는 농민들에게 꽤나 큰 동기부여가 되었다.

여성들과 아이들은 줄다리기, 널뛰기, 굴렁쇠 굴리기 같은 놀이로 장터에서 흥을 돋웠다. 특히 널뛰기는 주로 명절에 열렸지만 장터에서도 즉석에서 널판을 구해놔 장터 여흥거리가 되었다. 굴렁쇠 굴리기나 제기차기 같은 유희도 남녀노소 구분 없이 참여할 수 있었다. 또 일부 장터에서는 소리꾼이나 탈춤패가 즉석 공연을 하며 사람들을 모았다. 판소리나 단가를 부르는 광대들은 이야기를 재치 있게 풀어가며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냈고, 주막 근처에서는 재담꾼이 관객들에게 구수한 입담을 뽐내며 술자리를 더욱 흥겹게 만들었다.

장터 여흥문화는 단순한 놀거리가 아니라 마을 사람들 간의 유대감을 다지고, 힘든 농사일 중에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는 귀중한 쉼터 역할을 했다. 사람들은 장터 여흥을 통해 서로의 소식을 나누고, 마을과 마을 간 관계를 재확인하며 자연스럽게 공동체 의식을 강화했다.

장터 주막과 먹거리, 흥겨움의 절정 

장터에서 풍물놀이와 민속놀이는 주로 마당에서 이루어졌다면, 여흥의 진짜 절정은 주막에서 벌어졌다. 조선시대 주막은 단순한 식당이 아니라 장터 문화의 중심지였다. 주막에서는 막걸리, 동동주, 메밀전, 빈대떡, 술국 같은 서민 먹거리가 인기를 끌었고, 사람들은 풍물패 공연을 본 후 자연스럽게 주막에 모여 술잔을 기울였다. 주모들은 주막 앞 평상에서 즉석 노래자랑 판을 열거나 간단한 퀴즈놀이를 통해 손님들을 즐겁게 했다.

주막에서는 민간 설화가 오고 가고, 근처 포구에서 들려온 뱃사람들의 기이한 경험담이 자연스럽게 구비 전승되었다. 일부 장터에서는 주막 옆에서 뱃사공들이 뱃노래를 부르며 즉흥 놀이판을 여는 풍경도 흔했다. 장터 주막은 지역 사람들뿐 아니라 인근 포구에서 온 상인, 어부, 행상인들이 모여 서로의 문화를 교류하는 ‘작은 문화 장터’ 역할을 했다.

흥이 무르익으면 상인과 농민, 어부, 광대, 심지어는 아전까지 함께 어울려 술잔을 돌리고 노래와 춤으로 마무리하는 광경도 드물지 않았다. 주막의 여흥문화는 단순한 음식과 술이 아니라 조선 사람들의 삶에 숨통을 트이게 해주는 중요한 문화공간이었다.

장터는 서민문화의 핵심 공간이었다 

조선시대 장터는 단순한 거래의 공간이 아니었다. 풍물놀이와 다양한 여흥문화가 사람들을 모이게 했고, 장날은 농민과 상인, 포구의 어부들까지도 하나 되는 축제의 날이었다. 장터 풍물놀이는 공동체의 활력을 불어넣었고, 씨름, 널뛰기, 판소리 같은 민속놀이가 서민들의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중요한 문화적 장치였다. 주막은 먹고 마시는 것을 넘어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지역과 지역이 소통하는 문화 네트워크의 핵심이었다. 조선시대 장터 속 여흥문화는 오늘날에도 마을축제나 전통놀이 속에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으며, 조선 백성들의 흥과 정서가 어떻게 살아 숨 쉬었는지를 보여주는 귀중한 역사적 자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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