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생활사시리즈

조선 시대 장터 - 대체 화폐들

xolo1215 2025. 7. 13.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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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장터 대체 화폐들

조선 상인의 지갑엔 엽전보다 쌀이 있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조선 시대의 화폐는 엽전이나 상평통보 같은 동전이다. 그러나 실제로 장터 현장에서 사람들은 늘 돈을 가지고 다닐 수 없었고, 때로는 아예 돈보다 쌀, 베, 약초, 소금 같은 물품이 훨씬 더 실용적인 화폐로 사용되었다. 이처럼 공식 화폐가 있음에도 실제 시장에서는 ‘물물교환’과 ‘비공식 화폐’가 함께 작동했던 조선의 장터 경제는 생각보다 훨씬 유연하고 복합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이 글에서는 조선 시대 장터에서 통용되었던 다양한 비공식 화폐와 물물교환의 실태를 살펴보고, 그것이 당시 서민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자세히 분석한다. 이는 단순한 역사 기록이 아니라,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조선의 생활 경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

조선의 공식 화폐만으로는 부족했던 현실

조선 정부는 세종대 이후로 ‘화폐 경제’를 활성화하려 했지만, 상평통보가 본격적으로 유통되기 시작한 건 숙종(17세기 후반) 무렵이었다. 그 이전에는 동전 자체가 귀했기 때문에 장터에서 대부분의 거래는 실물 자산 기반의 교환으로 이루어졌다.

지방에서는 동전보다 쌀과 베가 더 가치 있는 화폐로 통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화폐보다 무게를 재는 저울이나 도량형 도구가 더 중요하게 여겨졌을 정도였다.

즉, 돈이 아니라 물건의 실질 가치가 거래의 기준이었던 것이다.

장터의 대표적 ‘비공식 화폐’들

쌀(米): 조선 장터의 실질 기준통화

쌀은 항상 일정한 수요가 있었고, 보관과 운반이 비교적 쉬워서 가장 널리 사용된 비공식 화폐였다.

예를 들어, “쌀 한 되로 소금 두 되” 같은 거래 방식이 장날에 흔했다.

어떤 장터에서는 물건 가격을 "쌀 몇 되" 기준으로 붙여 놓기도 했다.

 

베(布): 의복과 교환되는 고급 물물 단위

베는 농촌 여성들의 직조 노동의 결과물로, 생산 비용이 크기 때문에 고가품이나 장기 보관용 자산으로 쓰였다.

베 한 필로 쌀, 장작, 고기 등을 교환할 수 있었으며, **‘화폐 대신 저축 수단’**이 되기도 했다.

때로는 혼례 지참금이나 채무 상환 수단으로도 활용되었다.

 

소금: 산간 지역의 핵심 화폐

소금은 육류와 생선을 저장하거나 반찬을 만드는 데 필수였기 때문에 특히 내륙에서는 금처럼 귀한 물품이었다.

남해안 포구에서 올라온 소금은 내륙 장터에서 고기, 술, 땔감과 교환되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소금을 쌀보다 가치 있게 여긴 경우도 있었다.

 

약초: 지방 특산물의 고급 교환 수단

더덕, 인삼, 천궁 같은 약초는 약방과 중개 상인들 사이에서 상품가치가 높은 비공식 화폐였다.

약초를 모아 오는 사람들이 그것을 가지고 장터에서 생활용품과 직접 교환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물물교환이 활발했던 이유

신용 기반이 약함

당시 농민이나 장꾼들은 신용으로 물건을 거래하기 어려웠고, 기록이나 보증이 없었기 때문에 즉시 실물 교환이 안전한 방법이었다.

소액 거래의 불편함

엽전이 있다고 해도 소액 단위로 정확히 나누기가 어려웠고, 잔돈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교환이 더 실용적이었다.

이동상 거래 환경

 장꾼들은 무겁고 많이 챙기기 어려운 화폐보다는, 바로 쓸 수 있는 쌀, 소금, 약초 등을 거래물로 선호했다.

 

실제 장터에서의 교환 방식 예시

“쌀 한 되와 고등어 두 마리를 바꾼다”
동해안 근처 장터에서 흔한 거래였고, 쌀의 품질에 따라 생선의 종류도 바뀌었다.

“베 반 필로 장작 한 짐”
 겨울철 내륙 산촌 장터에서 성행했던 방식.

“소금 반 되로 담배 두 묶음”
 충청 이북의 산간 장터에서 실제 기록된 거래 사례.

이런 교환 방식은 그 지역의 생산물과 소비 수요에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된 경제 질서였다.

비공식 화폐와 사회 계층의 연결

양반 계층은 주로 엽전이나 은(銀)을 사용했지만, 지방에선 여전히 물물교환이 일반적이었다.

상민·서민 계층은 자신이 직접 만든 쌀, 베, 소금, 나무 등을 활용해 생활 필수품을 얻었고, 이를 통해 자급자족 구조를 유지했다.

보부상은 이 비공식 화폐를 엽전으로 환전해주는 ‘환전 역할’도 수행했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의 장터는 단순한 상거래를 넘어선 ‘실물 경제의 현장’이었다

조선 시대 장터에서 이루어진 물물교환과 비공식 화폐의 활용은 단순한 경제 활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역 주민들의 삶과 노동, 생산과 소비가 하나로 이어지는 현장이었다.
돈이 없어도 장터는 돌아갔고, 사람들은 자신의 노동 결과물을 직접 교환하면서 공동체 경제를 유지했다.
이처럼 조선의 장터는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장소를 넘어서, ‘공유 자산 경제’의 초기 형태를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공간이었다.
현대의 시장경제와 비교해 보면, 이와 같은 실물 기반의 교환 경제가 오히려 더욱 인간 중심적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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