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장터
조선 후기 장터에서 벌어진 분쟁과 해결 방식
시장통에서 벌어진 다툼, 누가 나서고 어떻게 마무리했을까?
조선 후기, 오일장과 상설시장은 지역 경제와 생활의 중심지였다.
삼례장, 강경장, 마포장 같은 장터에서는 곡물, 어류, 직물, 생필품이 거래되었고,
그만큼 사람이 많이 모이고, 다툼도 많았다.
소매치기, 물건값 흥정 싸움, 좌판 자리 분쟁, 짐꾼 간 시비 등 크고 작은 문제들이 일어났지만
조선 사회는 이것을 경찰도, 현대적 재판도 아닌 나름의 방식으로 해결해 나갔다.
이 글에서는 조선 후기 장터에서 발생한 다양한 분쟁 사례와,
그 갈등이 어떻게 해결되었는지를 생활사·사회사적 시선으로 살펴본다.
장터에서 자주 벌어진 분쟁 유형
물건값 다툼 (흥정 실패 → 시비 발생)
장터는 정찰제가 아니었다. 모든 거래는 흥정으로 이루어졌고,
가격에 대한 불만으로 실랑이가 생기기 쉬웠다.
“이건 도둑놈도 이런 도둑놈이 없구만!” 하는 소리가 퍼지면,
주변 상인들과 지나가던 사람들이 몰려와 상황을 구경하거나 말렸다.
자리 싸움 (좌판 위치 다툼)
오일장에서는 누가 어디에 자리를 먼저 깔았는지가 민감한 문제였다.
‘길목 좋은 자리는 돈이 된다’는 인식 아래,
이전 장날에 깔았던 자리를 두고 싸움이 자주 발생했다.
짐꾼·객주의 충돌
물건을 옮기는 짐꾼들이 운임료를 두고 다투거나,
객주와 운반책 사이에서 중간 마진을 두고 시비가 붙는 경우도 있었다.
절도 및 사기
장터는 유동 인구가 많아 소매치기나 속임수 거래가 많았다.
“속에 돌을 넣어 무게를 늘린 쌀가마”나 “부러진 물건을 속여 판 좌판”은 자주 목격되었다.
조선 후기, 장터의 질서 유지는 누가 했나?
포도청과 포졸은 대부분 도성 안 중심
지방 장터까지 관리하기에는 인력과 제도 모두 부족
지역별 자치적 해결 구조 존재
장두(場頭) 제도
장두는 장터의 비공식 책임자로, 대개 장터를 오랫동안 운영해온 노련한 상인이나 객주 중에서 선출됨
장터 내 분쟁 조정, 장소 배분, 상인 간 갈등 해결을 맡음
어느 정도 공공성을 인정받아 지역 관아에서도 묵인
향약(鄕約)과 장터 공동체
일부 지역에서는 향약 규범에 따라 장터 내 질서도 통제
“불상사를 일으키면 다음 장날 입점 금지” 같은 자율 규약이 존재
관아의 포상 파견
장이 크게 서는 날, 관아에서 포졸이나 이방을 파견하여 순찰
상인이 도망치거나 사건이 크면 이방이 현장 체포 → 관아 송치
분쟁 해결 방식 – 처벌보다 조정 중심
조선 후기 장터의 분쟁 해결 방식은 형벌보다 조정에 가까웠다.
다툼이 발생했을 때, 장두나 객주가 먼저 나서 중재에 들어갔다.
중재 사례
물건값 시비 → “쌀 한 되 얹어서 팔아라” 식의 조정
자리 다툼 → “다음 장날 이 사람에게 양보하기로 하라”
사기·절도 → 장두가 본인 책임 하에 배상하거나 관아에 신고
관아 개입 최후의 수단
피를 보거나, 도망자가 생기면 관아 개입
이방이 장터로 출동해 조사 → 대개 퇴장 처분 또는 곤장형
장터 질서 유지에 기여한 인물들
객주(客主)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 시장 질서 유지자 역할도 수행
장날 마다 임시로 고용된 운반 인력, 좌판 상인들을 관리
주모·포주
장터 주변 주막을 운영하며 정보 교류 허브 역할
싸움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면 “시비 붙지 말고 술이나 한잔 하소~” 하며 중재
조운 관리자
마포, 군산 같은 수운 중심지에서는 **조운선 관리자(조운사)**가
현장 통제 및 창고 질서 유지 역할을 함께 수행
장터 분쟁은 어떻게 역사 속에서 사라졌는가?
근대 이후 시장 등록제 도입
→ 자율좌판 → 고정점포 + 규제 구조 전환
경찰제도 도입
→ 지방 시장 질서도 국가 치안 시스템으로 통합
‘장날’의 의미 퇴색
→ 5일장 소멸 → 현대 상설 시장 체계로 일원화
→ 지역 공동체 단위의 ‘현장 해결력’은 역사 속으로 사라짐
장터의 싸움은 조선 민중 질서의 거울이었다
조선 후기 장터에서 벌어졌던 다툼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경제적 이해관계, 신분 간 긴장, 정보 불균형 등 당대 사회 구조가 압축된 장면이었다.
그리고 그 분쟁을 해결한 이들은
관료가 아닌 장터의 사람들, 상인, 객주, 주모, 마을의 어른들이었다.
이러한 ‘현장 해결의 문화’는 지금은 사라졌지만,
조선의 장터가 단지 물건만 오가던 공간이 아니라,
사람과 규범이 살아 있던 ‘작은 사회’였음을 보여주는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