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포장 - 어류 젓갈 중심의 남도 장터
어류·젓갈 중심의 남도 장터, 강과 바다가 만난 생명의 시장
전라남도 나주, 영산강이 유유히 흐르는 그곳에 조선 후기 활기를 띠던 장터가 있었다. 이름하여 ‘영산포장(榮山浦場)’. 이곳은 영산강 수운을 따라 흐른 수많은 물자와 사람, 그리고 남도의 풍부한 어류와 젓갈이 모여 형성한 남도 최대 어시장 중 하나였다. 조선 후기에는 단순한 어물 시장이 아닌, 내륙과 해안의 연결점이자 지역 경제를 움직이던 중심지였으며, 어부, 상인, 객주, 주모, 뱃사공이 얽혀 형성한 복합적인 장터 문화가 존재했다. 이 글에서는 영산포장이 어떤 방식으로 형성되었고, 무엇이 거래되었으며, 어떤 풍경이 장터를 가득 메웠는지를 복원한다.
영산포의 위치와 장터 형성 배경
영산포는 영산강 중하류에 위치한 수운 중심 포구였다.
나주, 함평, 목포 등 전남 내륙과 서해안 포구를 연결하는 중간 지점이었고,
바다에서 올라온 해산물과 내륙에서 생산된 농산물이 이곳에서 만나 교류되었다.
조선 후기, 영산포는 나주 객사와도 가까워 행정적·경제적 기능이 함께 결집된 지역이었다.
또한 근처에 ‘장터거리’라 불리던 마을이 존재했고, 5일장과 정기장이 모두 운영되며 정규 시장으로 성장하였다.
거래 품목 어류·젓갈 중심 시장의 특색
영산포장은 일반 장터와는 다르게, 어류와 젓갈, 해산물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은 장터였다.
어류 및 수산물
참조기, 민어, 망둥이, 붕어, 장어
뱀장어(민물), 숭어 등 강과 바다의 중간 어종도 함께 거래
젓갈류
홍어젓, 갈치속젓, 병어젓
조선 후기 기록에도 ‘영산포 젓갈’ 언급 있음
부가 식품
생선 말림용 대나무 틀, 염장 소금, 항아리
생선 염장 기술과 함께 ‘숙성’ 관련 지식과 상품도 함께 유통
영산포장은 단순히 생선을 사고파는 곳이 아니라,
보관·숙성·운송까지를 포함한 해산물 유통 복합지였다.
장터 풍경 냄새와 소리로 가득한 남도의 장날
장날이 되면 영산포장은 물고기 냄새, 소금기, 젓갈 냄새로 가득 찼다.
상인들은 생선을 직접 보이며 흥정했고, 아낙네들은 젓갈을 손가락으로 찍어 맛본 후 가격을 깎았다.
장터의 일상적 풍경
젓갈 단지를 이고 오는 행상
말린 생선을 광목에 싸서 매는 어물 상인
막걸리를 내주는 주모의 “한 사발 더 주께잉~”
뱃사공과 상인이 싸우는 흥정 현장
“참조기 싸요~ 새벽에 잡은 거요!” 외침이 퍼지는 강가
영산포장은 그 냄새와 소리 자체가 장터의 아이덴티티였고,
조선 후기 남도 사람들의 삶과 직결된 생계의 공간이었다.
객주와 수운 인력의 활동
영산포에는 ‘객주’라 불리는 상업 중개인이 존재했으며,
그들은 다음과 같은 역할을 했다:
어물 매매 중개
숙소 제공
외상 거래 장부 정리
포구 도착 선박 정보 제공
이외에도 짐꾼, 뱃사공, 육로 상인이 함께 모여 **물류와 장터가 분리되지 않은 ‘일체형 구조’**를 형성했다.
즉, 포구 = 장터 = 숙소 = 경제공동체였다.
일제강점기와 현대 영산포의 변화
영산포장은 일제강점기 이후 영산강 수운 쇠퇴와 함께 점차 규모가 줄어들었다.
특히 철도가 개통되고 도로 물류가 중심이 되면서, 생선은 트럭으로 운반되고, 젓갈은 공장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현재의 모습
영산포 젓갈시장’이라는 이름으로 일부 전통시장 기능 유지
영산강 둔치에는 황포돛배 체험이 운영되며 역사 문화 복원 시도 중
장터의 중심이었던 포구 마을 일부는 관광지화되고 있음
영산포장은 강과 바다, 사람과 삶이 만난 ‘남도 생선 장터의 상징’이었다
영산포장은 단지 생선을 파는 시장이 아니었다.
그곳은 강과 바다를 오가는 물류의 연결점, 생선을 다루는 기술과 지식의 교차점,
그리고 어부, 뱃사공, 상인, 주모가 함께 살아가던 복합 공동체의 현장이었다.
지금은 젓갈 단지를 직접 이고 가는 사람은 사라졌지만,
그 장터의 풍경은 여전히 전통시장 골목의 소리와 냄새 속에 살아 있다.